'히로히토'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1.01.07 전쟁+권언유착= 망국
  2. 2010.12.22 ‘천황 군대’의 전시 국민행동요령


권·언유착. 이 괴물은 특히 나라가 어수선할 때 본색을 드러낸다. 

1931년 만주사변이 터지고 국제정세가 장난이 아닐 때 일본에 거대 통신사가 발족했다. 36년 1월 국가총동원 체제를 구축하고 있던 일본은 당시 두 통신사를 합병, 도메이(同盟)통신사를 만들었다. 국영통신사다.

출생 때부터 도메이통신의 역할은 태평양전쟁에 대한 일본 국민의 전의를 불태우는 프로파간다 보도였다.


무선 통신망과 전용 비행기를 통해 세계 각지에 '일본의 승전보'를 타진했고 '도메이 사진 특보'라는 일간 사진 뉴스를 제작해 일본 전국에 배포하며 '무적 일본'을 외쳤다. "가자! 폭악무도한 미·영 격멸…". 기사 제목만 봐도 그 색깔이 보인다.

일본군이 외국 어린이들과 함께 놀고 도와주는 모습의 사진을 게재하는 등 구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킨다는 '대동아공영권'을 합리화하는 데 일조했다. 

일본군이 가는 곳에는 늘 야전지국이 개설됐다. "히노마루가 나부끼는 곳에 도메이가 있다"는 도메이통신의 슬로건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인력규모도 어마어마했다. 44년 4월, 도메이통신의 해외 지국은 총 70여곳. 직원 수는 중국 지역에만 1700명에 이르렀다. 현재 교도통신의 특파원은 70여명이다. 

도메이통신은 보도 차원을 넘어 일본 정부로선 가장 핵심적인 임무를 띠고 있었다. 승전을 위한 해외 정보 수집에도 전념해야 했다.

정부로부터 기밀비 명목으로 거액의 돈을 받고 해외통신사가 발신하는 무선내용을 독점적으로 감청하는 권한을 얻었다. 수집 정보 가운데 자국민 귀에 들어가서는 안되는(전세에 불리한) 극비 정보를 정부 수뇌부에게 전달하는 게 도메이통신의 핵심 임무였다.

그러나 전세가 점점 연합군 쪽으로 기울면서 '대본영' 발표내용과 실제 해외에서 들어오는 정보 간 괴리는 커져만 갔다.

기자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곧 패전병이 될 것이라는 것을. 세월이 흐른 후 당시 기자였던 A씨는 "해외통신사에 맞서기 위해 거짓 뉴스를 만들어야 했다. 저쪽이 이긴다고 방송하면 우리도 이겼다는 뉴스를 내보냈다"고 고백했다.

해외 정보를 빼놓지 않으면서 자국의 형편을 꿰뚫고 있는 기자들인지라 당연히 짙은 먹구름이 몰려 오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이 또한 상부에 보고했다. 히로시마 원폭투하를 인정한 트루먼 성명을 정부에 전달, '종전 공작'을 펴게 한 일등공신이 도메이통신이었다. 그야말로 비판과 견제를 포기한 '딸랑이' 언론이었던 셈이다.

도메이통신의 기사  원본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패전 직후 상부에서 소각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당시 수많은 자료를 불태워 생긴 연기가 수일간 피어올랐고 통신사 본사가 있던 도쿄 치요다구의 히비야공원을 뒤덮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도메이통신의 '오역' 이야기는 유명하다. 여러 주장이 얽히고설키고 있지만.

45년 7월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국 수뇌들은 포츠담선언을 통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무조건 항복'과 '완전한 파멸' 중 택일하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일왕 히로히토는 시간을 끌었다. "무조건 항복 요구에 대한 답변을 당분간 보류한다"는 성명서를 스즈키 간타로 총리 명의로 발표했다.

그런데
스즈키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모쿠사츠(黙殺, mokusatsu)'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모호한 표현이었다. 이는 '묵살한다'(ignore)와 '언급(논평)을 삼간다'(no comment)라는 두 가지 뜻을 갖고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도메이통신이 영문기사에서 '모쿠사츠'를 '묵살한다'(ignore)로 타전해버렸다. '라디오 도쿄'의 영어방송도 똑같이 전했다. 그러자 로이터와 AP통신은 이를 'reject'(거부)로 재가공했고, 미 트루먼 대통령은 뿔났다. 그래서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기로 결정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결과론적으로 도메이통신은 진정으로 세계평화를 바란 언론사였다?! 

국민을 시각·청각 장애인으로 만들어버리는 권언유착은 그래서 망국의 지름길이다.



Posted by 경향교열 고영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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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군이 연평도 해상사격훈련을 실시하기 직전, 트위터에선 ‘전시 대피 요령이 적힌 공문이 집에 왔다’는 내용들이 올라왔다. 그래서 궁금했다. 애 엄마에게 물었다. 우리 집에도 그런 게 왔느냐고. 잠시 후 쓰레기통으로 향하기 직전의 그 ‘찌라시’(아래 사진)를 볼 수 있었다.

맨 위 제목부터 보고 뜨악했다. <전시 국민행동요령>이다. 공습경보 발령, 대피시 필수지참 용품…. 마치 ‘전쟁이 곧 일어날 것이니 준비하시오’로 보였다. 나름 확신했던 ‘전쟁불가론’이 ‘전쟁불가피론’으로 바뀌는 데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공문’은 군대 영장처럼 사람을 떨게 만든다.



대피요령 찌라시만 봐도 이럴지언정, 북한 해안포와 마주하고 있는 연평도 현지 대피소에 있던 주민들과 취재진은 어땠을까. 신문을 보니 다들 대피소 문닫는 소리에, 우리 군이 쏜 포 소리에 전쟁 난 줄 알고 새가슴이 됐다고 한다.

이때다 싶었을 터. 정권은 국민을 살린답시고 사회를 안보정국으로 몰아가고 있다. (총성으로 분위기를 일신하겠다는 위정자나, 고령에도 군복을 입고 “때려잡자”고 외치는 그분들을 제외한) 국민은 전쟁을 원치 않는다. 두려워한다.

그날, 전범국가 일본도 떨었다. 아니, 떨 겨를도 없었다. “천황 폐하 만세”를 외쳤던 일본인들이다. 그러나 ‘천황’은 그들을 불지옥으로 떠밀었다. 강제로 끌려간 한국인들은 더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1945년 3월10일 새벽, 미군 제73, 313, 314 등 3개 항공단으로 구성된 B-29 폭격기 344대가 일본 심장부를 습격했다. 글리세린과 기름을 섞어 만든 소이탄
2400t을 퍼부었다. 지옥불을 맞은 도쿄의 밤은 대낮처럼 밝아졌고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일본은 1944년 11월14일 이후 106회의 공습을 당했다. 이전 공습과는 달리 이날 대공습은 저고도 비행에 의한 야간 소이탄 공격이어서 피해는 막대했다.

불 붙은 기름이 강, 바다에서도 불길을 일으켰다. 시체는 검게 타 남녀를 구분할 수 없었고 물에 떠다니는 사지는 불에 탄 나뭇가지와 구별하기 어려웠다. 당시 경시청은 8만3793명이 사망했다고 밝혔지만 10만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수공장에 강제로 끌려 온 1만명이 넘는 조선 사람들도 희생됐다. 7만여구가 신원 확인이 안됐다.



방공대책은 ‘너희들은 살 생각 말라’는 식이었다. 내무성이 작성한 자료는 “불이 나더라도 경찰 소방 관리나 경방단(방공 임무를 띤 민간조직)의 지도가 있을 때까지 끝까지 소화와 연소 방지에 나선다”고 적고 있다. 불에 타 죽은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다. 

국민에겐 도망치지 말 것을 강요하면서 정작 군대는 적기를 향해 사격도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피해 주민에게 군대가 가진 식량 중 일부를 떼어 도와주는 일도 없었다. 군이 주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민의 희생으로 군이 살아남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폐하의 신민(臣民)은 국체를 지키기 위해서는 옥쇄(玉碎)를 각오해야 한다.” “우리는 국가를 지키는 전사다. 목숨을 바쳐 지키겠다.” 이른바 ‘천황 군대’는 도쿄 시민을 “황거를 지키는 명예로운 방위전사”로 규정했다. 
 
군인칙유(1882년 천황이 군인에게 ‘하사’)에서는
군인의 덕목 가운데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가장 중요시했다. ‘천황 통수권’ 아래 일본군을 국민의 군대가 아닌 ‘천황의 군대’로 규정하고 있다. 상관의 명령은 곧 ‘천황의 명령’이니 절대 복종해야 하며 군인의 죽음은 ‘천황에 대한 충절’을 뜻했다.

일왕은 공습을 당한 일주일 후 피해지역을 시찰했다. 신문은 그의 시찰 모습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신문제목만 봐도 낯간지럽다. ▲황송스럽게도 천황폐하 피해지역 순찰 ▲초토화된 땅에 서신 폐하의 인자하신 마음
▲적을 멸망시키겠다는 1억 일본인의 맹세가 새롭다…. 사진 설명도 기가 찬다. “초토화된 땅을 도보
로 둘러보시다.” 말 타고 시찰했어야 정상이란 말인가? 

피해지역을 시찰 중인 히로히토 일왕.


전후 미국은 일왕의 전쟁책임을 따지지 않았다. 그를 위해 죽은 이들을 신으로 떠받드는 군국주의 색채의 야스쿠니신사도 폐쇄조치를 면했다.

도쿄대공습 후 정든 땅을 떠난 이들은 처참한 체험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다음과 같은 함구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공습피해나 방공 전투 상황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신문이나 라디오를 통해 당국이 알려준다. 이 발표를 절대로 신뢰하고, 마음대로 상상해서 지껄인다거나 직접 보거나 들은 것일지라도 가볍게 글로 쓰거나 말하는 것은 악선전의 원인이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자료
일본의 불안을 읽는다(권혁태), 천황제 50문50답(일본역사교육자협의회), 위키피디아

트위터 @godori71

Posted by 경향교열 고영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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