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5월16일 새벽 5시30분, 비가 내리는 가운데 경찰은 야마나시현 가미쿠이시키의 한 시설 출입구를 절단기로 따고 들어갔습니다. 경찰의 타깃은 일본 심장부를 아비규환으로 만든 옴진리교 교주 아사하라 쇼코였습니다. 외신기자 등 취재진 200여명이 경찰의 수색 순간을 보도하는 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아사하라는 체포되기 직전 명상 중이었다고 합니다.


3개월 전 3월20일 출근시간대 옴진리교는 도쿄 지하철 마루노우치·히비야·지요다선 등 3개 노선, 5개 차량에 맹독성 사린가스를 살포해 13명을 숨지게 하고, 6300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테러를 감행했습니다. 시민들은 근육이 마비되고 콧물과 눈물을 흘렸고 구토까지 했습니다. 어떤 이는 숨을 쉴 수조차 없었고 일부는 동공이 수축돼 갑자기 눈이 안보이는 등 시민들은 지하철 곳곳에서 쓰러져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교주 아사하라가 체포된 이후 일본 당국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용의자들을 추적하는 한편, 사린 또는 무기류 색출, 지하철 테러에 대비한 경계강화 등을 지시했죠.

ⓒ요미우리신문


16년이 지난 올해 11월21일 일본 최고재판소는 사린가스를 만드는 데 관여한 교단 간부 엔도 세이치 피고인의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했습니다. 수의사 출신인 엔도는 교단에서 사린가스 등을 개발하는 역할을 맡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1994년 마쓰모토 사린 사건과 1995년 지하철 사린 사건 등 4건에서 19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이로써 옴진리교 재판은 1995년 시작 후 16년 만에 교주 아사하라 등 13명의 사형 확정으로 일단락됐습니다. 하지만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 실행범 3명은 여전히 도주 중이라고 합니다.


일본 당국은 사건 직후에 480여명을 체포했고 189명을 기소했습니다. 13명은 사형, 5명에겐 무기징역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그리고 167명이 유기징역 실형 및 집행유예를 받았습니다.


공포의 이 옴진리교는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교주가 사형이 확정됐어도 교세는 확장하고 있다는 것이죠. 교단을 ‘알레프(Aleph)’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여전히 ‘아마겟돈’을 주장하는 아사하라를 추종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 옴진리교, 교주 사형 확정됐어도 교세 확장  



불교와 요가에 종말론적인 기독교적 철학을 결합한 옴진리교는 1984년 출발했습니다. 획일적인 사회 분위기에 답답함을 느끼던 젊은층이 추종자들의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설립 10년 만에 일본 내 신도수 1만명, 해외에도 4개 지부를 둘 정도로 급성장했죠.


자칭 일본에서 유일한 “최종해탈자”라는 아사하라는 신과 죽은 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설파해왔습니다. 1995년 11월에 핵·생물·화학전으로 인류가 종말을 맞게 되지만 옴진리교 신자들은 선과 악의 최후 결전에서 승리해 천년왕국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그 천년왕국의 왕이라는 것이죠.


직접 작사, 작곡해 노래를 부르는 싱어송 라이터이기도 했다는 아사하라의 아마겟돈 사상은 <우주전함 야마토>가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신자들에겐 “내 전생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투수였다”고 말하기도 했다네요.


아사하라 교주의 여자관계는 복잡합니다. 혼인관계를 맺은 마쓰모토 도모코 외에도 재정을 담당했던 간부 이시이 히사코(아래 사진) 등 5명의 애인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미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내인 마쓰모토와의 사이에는 6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최근 일본 여성주간지 ‘여성자신’이 아사하라의 여인들의 근황을 보도했는데요.


보도에 따르면 아사하라의 아내 마쓰모토와 자녀들은 현재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으며, 아내 마쓰모토는 지금도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미인 간부로 알려진 한 여성은 과거엔 아사하라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으나 그 사건 후에는 비참한 생활을 보내고 있습니다. 일본 수사당국 관계자는 “그녀는 지금, 도쿄 교외에 있는 집에서 부모와 살고 있다. 복역 중에 뇌출혈로 쓰러진 후 지금도 후유증으로 지팡이와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또한 옴진리교의 재무담당이었으며 "여제"로 불린 이시이는 아사하라와의 사이에 쌍둥이를 포함한 3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현재 자녀들과 살지 않고 가나가와현 근교에서 아버지와 둘이서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전 옴진리교 피해대책 변호단의 변호사는 “옴진리교에 연관된 여성들은 가족과 화해한 이들이 많다. 반면 교단으로부터 빠져나왔지만 인간관계가 삐걱거려 고독 속에서 살고 있는 이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옴진리교가) 많은 여성들의 인생을 망가뜨린 것은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아사하라 교주에 대한 에피소드에 눈길이 갑니다. 공중부양으로 40cm까지 떴다고 자부하는 인물입니다. 물속에서 숨을 멈추는 수행에선 5분 가까이 견딘 신자에게 “뭘 무서워하나”라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15초만에 물속에서 나왔다고 하네요.

아사하라가 존경한 인물은 이시하라 신타로 현 도쿄도지사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배타적인 데다 핵무기 보유를 주장하며 일본 군국주의 회귀를 바라는 이 양반이 총리가 되면 큰일날 것이라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아사하라 교주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지적이기 때문이라네요. 아사하라와 이시하라. 이름도 참 비슷하네요. 교주는 이시하라 같은 사람이 일본의 수장이 된다면 재미있을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이시하라가 집권하면 평소 주창한 아마겟돈이 빨리 도래할 것이라 믿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아사하라 교주의 유명세는 국경을 초월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출근길 '묻지마' 사린가스 테러는 해외에서도 보기 드문 사건이었습니다. 아사하라는 타임지 1995년 4월3일, 일본인으로서는 1971년 10월4일자의 히로히토 일왕 이후 23년 반 만에 표지인물이 되기도 했죠.


아사하라는 늘 “(나는) 시력이 없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옴진리교 관련 재판정에서 선서문을 변호사가 말하는 대로 비교적 빠른 시간에 써냈는가 하면, 눈이 보이지 않는다면서도 평소에 유명 연예인의 누드 사진집을 소장하고 있었다고 하네요.


그는 경찰조사 때도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를 이유로 조서에 사인을 거부했으나, 그는 “형사 양반은 멋지네요” “당신은 (형사 드라마) <태양을 향해 외쳐라>의 보스 같다”는 등의 발언을 했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데 그의 여인들은 하나같이 미인이었다는 점만 봐도 참 신기할 따름입니다.


교주 아사하라는 체포될 당시 경찰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믿진 않겠지만, 앞을 볼 수 없는 내가 그런 일(살인)이 가능했겠느냐.”

사형이 확정된 그는 지금도 가스 살포 지시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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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은영 2012.06.15 14: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ㅋ참 어이가 없네요 너무 바보같아서 재밋고 안타깝습니다..


 

재작년 11월6일 당시 정운찬 총리는 국회에서 진땀을 빼야 했습니다. 옛 일본군의 세균전 부대인 731부대를 “항일독립군”이라고 답했기 때문이죠. 곧장 바로잡았지만 논란이 커졌습니다. 올 초에는 홍준표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과의 설전에서 정 위원장이 자신을 향해 “뭘 알겠느냐”라고 반박한 대목을 언급하며 “나는 731부대가 일본의 세균전 부대, 잔혹한 생체부대였던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비꼬기도 했습니다.


앞서 6년 전에는 MBC가 <뉴스데스크>에서 “러시아 군사영상보관소에 있던 731부대의 자체 촬영화면이 공개됐다”며 동상실험, 페스트균 실험, 장기 해부 실험 등이 자행되고 있는 흑백 영상을 “단독” 보도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영화의 한 장면으로 드러났고 MBC는 공식 사과했습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731부대의 만행은 늘 그림자가 되어 잊을 만하면 우리 앞으로 불쑥 나타납니다. 이번에 731부대의 세균전 피해자가 2만6000명이라는 극비문서가 일본에서 발견됐습니다.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 731부대가 전쟁 포로를 대상으로 반인륜적 실험을 했다는 사실을 공식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시설을 파괴하고 자료를 없앤 탓이죠. 역사적 사실은 생존하고 있는 당시 731부대원의 증언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731부대 관련 자료가 발견된 것은 의미가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일본 정부의 반응에 눈귀가 쏠리게 하니까요. 이 자료는 육군 군의학교 방역연구실에 근무하던 군의관의 극비보고서입니다. 731부대가 1940년부터 1942년에 걸쳐 지린성 등 중국 일대에서 페스트균에 감염된 벼룩을 살포했을 때의 기록이 적혀 있습니다. 벼룩을 살포한 날과 양, 1차 감염자와 2차 감염자 수 등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731부대는 만주 하얼빈에 거점을 두고 인간을 통나무라는 뜻의 ‘마루타’라고 부르며 생체 해부실험과 생체 냉동실험 등 온갖 비인간적 실험을 자행한 부대입니다. 중국인과 한국인, 러시아인 등 전쟁 포로에게 발진티푸스와 콜레라 등 세균을 주입해 세균전 실험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은 731부대가 세균전을 벌여 30여만명의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륜을 저버렸습니다. 실험용으로 쥐나 원숭이를 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실험 대상이 널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임상시험이란 게 일반 포유류에선 성공하더라도 인간은 부작용을 일으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지만 일본은 그럴 걱정이 없었습니다. 포로로 잡힌 이들로 시험할 수 있었습니다. 알려진 실험만 열거해도 구역질이 날 정도입니다. 마취를 하지 않은 채 장기를 적출하고, 출혈 연구를 한답시고 팔다리를 절단하고, 탄저균, 콜레라균, 매독균 등 각종 균을 주사해 결과를 살피고, 영하 50도의 추위에 발가벗겨 각종 실험을 자행하는가 하면, 원심분리기에 넣어 돌리기도 했습니다. 중국은 731부대 유적지를 보관해 극악무도한 생체실험의 현장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731부대 정식명칭은 관동군방역급수부본부. 초대 부대장은 이시이 시로(石井四郎) 육군 군의관(중좌)으로, 731부대는 이시이 부대로도 불렸습니다.


이시이 시로=위키피디아

일본 위키피디아는 생체실험과 같은 잔혹행위는 사실로 인정하지 않더군요. 부대 이름처럼 병사의 감염 예방과 이를 위해 위생 연구를 주임무로 하며 세균전에 사용할 생물무기를 연구·개발하는 기관이었다고 합니다. 다만 이를 위해 인체실험과 실전테스트를 했다는 “설도 있다”고 덧붙입니다.


이시이가 보기에 인간 생체실험은 생물무기를 개발하는 데 꼭 필요했습니다. 생물무기 공격대상이 인간이다 보니, 인체실험을 하면 개발할 무기의 효과를 곧바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 무기를 사용하려면 백신을 개발해야 했습니다. 이 또한 인체실험을 통하면 그 개발 속도는 더욱 빨라지죠.


731부대의 발상지는 도쿄입니다. 그 모체는 육군군의학교방역연구실이었습니다. 방역연구실은 창설자인 이시이가 2년간의 구미 시찰을 마치고 귀국한 2년 후인 1932년 8월에 발족했습니다.


당초엔 육군 공식 부대가 아니었습니다. 관동군참모부하에 놓여진 비밀부대였습니다. 실패하면 그 존재를 흔적도 없이 지울 계획이었던 것일까요. 이후 1936년 관동군방역부로 정식 출발합니다. 관동군방역부는 군령으로 태어납니다. 군령은 칙령과 함께 일왕이 내리는 명령이지만 칙령과는 달리 ‘공포’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군령은 각의를 거치지 않고 참모총장(육군) 또는 군령부총장(해군)이 일왕에 직접 신고하는 형태였습니다. 육군으로 활동했지만 공식적으론 일왕 승인을 얻지 않은 걸로 돼 있었습니다. 주요 임무인 인체실험이 실패하거나 탄로나도 일왕은 '나몰라라'하고 책임질 이유가 없어지는 셈이죠.


731부대 관련자는 대학 의학부의 젊은 교원들을 중심으로 모집됐습니다. 731부대가 정식발족한 이듬해인 1937년은 일본이 전쟁을 중국 전토로 확장하던 시기였습니다.


현지 병원과 보건소를 약탈, 적들을 공격하기 위한 생물전 기지로 삼았습니다.1942년 2월 일본이 싱가포르를 점령하자 그때까지 영국이 운영하고 있던 에드워드 7세 의과대학을 점령해 남방군방역급수부로 만들었습니다. 1936년부터 6년에 걸쳐 북쪽 하얼빈에서 남쪽 싱가포르까지 일본 점령지 대부분을 커버하는 체제를 구축한 것이죠. 하얼빈, 베이징, 난징, 광저우, 그리고 싱가포르 부대의 주 활동은 인간 생체실험과 세균 대량생산이었습니다. 5개 부대는 약 5500명으로 이뤄졌고, 이 가운데 인체실험을 행한 사실이 확인된 곳은 하얼빈, 난징, 그리고 광저우 부대입니다.

731부대를 지휘한 이시이에 대해 맥아더 사령관은 모든 혐의를 벗겨주었습니다. 이시이는 대학 총장까지 지냈습니다. 전쟁범죄 혐의로 그를 기소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생체실험 연구결과를 고스란히 미국이 받는다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죠. 


731부대원이었던 생존자들은 지금 눈물로 용서를 빕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습니다. 한 살아남은 자의 증언(2007년 4월8일 오사카에서 열린 국제심포지엄)을 들으면 그들은 인간이길 포기했단 생각만 들 뿐입니다.


와세다 세균학을 전공하고 731부대원이 된 그는 “매일 2~3명의 살아있는 사람을 해부했다”고 했습니다. 그러곤 “잘못된 역사를 사회에 알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며 증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의 소대는 페스트와 콜레라, 매독 등의 병원체를 인체에 주사해 감염 상태를 조사하거나, 인위적으로 인체를 동상시키는 일을 담당했다고 합니다. 그는 처음에는 두려웠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감각이 마비됐고, 매일 2~3명을 해부하지 않으면 일이 끝나지 않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고 술회했습니다. 그는 또 “많을 때는 하루에 5명까지 해부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 엄마인 군위안부를 해부한 적도 있습니다. 울고 있는 아이 앞에서 엄마는 죽어갔습니다. 아이는 동상 실험대에 올랐습니다.”




참고자료: 731부대의 간단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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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순덕 2011.10.17 19: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현재도 만행이  ↓↓↓↓↓

    사회적 약자에 대해 사회적 보호 시스템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오히려 힘있는 자들을 편들고 있는 현실고발

    【 S.O.S.&확산요망】
    현재일본장기거주중(영주권.
    일본공안경찰이 가담한 범죄피해[관민이 공모하여 쥐도새도 모르게 재산강탈?]를 받고 많은 증거를 가지고 호소중
    국가권력을 악용하여,온갖수단을 동원하여 무마/은폐를 꾀함
    일본경찰에 살해당할뻔한 일도 경험.

    http://blog.naver.com/ansunduck(새로개설한 한국어블로그
    http://blog.daum.net/ansund59(통제되어 현재정지 상태인 블로그
    http://blog.yahoo.co.jp/ansund59 (일본어

    관계공무원의 실명게재와 저의 개인정보를 전부 공개하여 허위가 아닙니다
    한일 양국의 많은 정치가,변호사,언론,인권단체등은 침묵뿐으로
    많은 분들의 관계기관에 제보,참여로 진상규명을 간절히부탁드립니다

    Twitter: koreaan59

  2. 팡이 2011.10.18 15: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간이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
    저런 전쟁범죄자를 단죄하기는커녕, 지위와 명예까지 줬다는 게 어이없을 뿐이예요. -_-;

  3. 김 성년 2011.10.19 09: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이라는 나라와 민족은 절대로 인류와 공존할수 없고 공존해서도 안될 존재들이다, 어느때 아침 뉴스속보 에서 일본열도가 태평양 깊은곳에 가라앉아 전설로만 존재하는 인종이 될 것이다!

  4. Dough mixer 2012.02.14 12: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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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나비 2012.03.05 20: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못 배워서 그래,


“1명은 차를 운전하고 나머지 2명은 칼로 범행한다. 죽고 싶지 않으면 게임에 참가하지 마라. ‘아키하바라’ 때보다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느닷없는 살인 예고에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엉뚱하게도 무차별 살인사건은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발생했지만.

 

다행히 범죄를 예고한 당일 일본에서 우려한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번 살인 예고에 일본사회가 바짝 긴장했다. 다들 208년 6월8일 발생한 ‘아키하바라 도리마(길거리의 악마)’ 사건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당시 아키하바라 도리마도 범행을 예고한 터였다. 7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했다.

아키하바라 도리마 사건 현장검증의 모습. 위키피디아

그날 점신시간대, 2톤 트럭이 신호를 무시하고 돌진, 파란불을 기다리던 행인 5명을 들이받았다. 이 트럭은 이어 신호 대기 중이던 택시와 충돌해 멈춰 섰다. 이를 목격한 사람들은 단순한 교통사고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트럭에서 내린 남성은 갑자기 살인마로 돌변했다. 행인과 경찰관 등 14명을 소지하고 있던 칼로 찔렀다.  괴성을 지르며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향해 칼을 휘두르다가 결국 경찰에 붙잡혔다. 10분도 채 걸리지 않은, 순식간에 벌어진 참사였다.


당시 25세였던 범인은 언제 잘릴지 모르는 비정규직 고용에 대한 불만과 두려움, 심한 고립감을 인터넷에 털어놓으며 "승자는 모두 죽여버려"라는 글을 남기고 예고한 대로 범행을 저질렀다. 범행 전까지 휴대폰을 통해1000여건의 글을 남겼다. 휴대폰으로 마음을 달래더니 점점 고립감에 빠져들었다. 그러곤 살인을 예고하기에 이른 것이다. 범행 당일 오전엔 “아키하바라에서 살인한다. 차로 들이받은 후 차를 쓸 수 없게 되면 칼을 꺼낼 것이다. 모두들 안녕”이라는 글을 올렸다.

체포 후엔 “생활에 지쳤다. 세상이 싫어졌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아키하바라에 왔다. (그 대상은) 누구라도 상관없었다”고 진술했다.
 

아키하바라 사건 범인이 체포되기 직전의 모습.

아키하바라 도리마 사건 후엔 살인하겠다는 등 범죄예고가 줄을 이어 7월7일(사건 발생 후 1개월)까지 33명이 검거됐다. 사건 전엔 월 2, 3건에 불과하던 범죄예고 글이 사건 후 한 달에만 100건 이상이 올라왔다. 대부분이 10, 20대였다. 초등생이 올린 글도 있었다.


일본 경찰청에 따르면 행인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는 이른바 ‘도리마’ 사건은 1998년부터 2008년까지 10년간 67건에 달한다. 아키하바라 사건이 발생한 지 1개월여가 지난 후 도쿄의 한 서점에서도 '묻지마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30대 남성이 서점에 들어가 흉기를 휘둘러 1명이 죽고 1명이 중상을 입었다.


아키하바라 사건 이전, 일본 범죄사상 전대미문의 무차별 살인사건이 있었다. 1938년 5월21일 미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카야마현에서 발생한 ‘쓰야마 사건’.  도이 무쓰오 사건이라고도 한다. 당시 21살이던 도이는 2시간도 안된 시간에 30명을 무차별 살해했다. 피바다를 본 후 그는 이내 자살했다.



2살 때 아버지를, 3살 때 어머니를 모두 폐결핵으로 떠나보낸 후 누나와 함께 할머니와 살던 도이. 학교성적은 우수했고 활달한 성격이었지만. 누나가 시집간 뒤 히키코모리, 즉 은둔형 외톨이가 된다. 

범행 1년 전 징병검사 때(중일전쟁) 그는 결핵으로 불합격 처분을 받는다. 이때부터 삐딱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 전에 관계를 맺던 여성들이 결핵을 이유로 그를 멀리한 것이다.


그를 무시한 여성들에 대한 복수심이 차올랐을 터. 유서에서도 범행 날짜를 고른 이유가 드러난다. 이전 그와 관계를 맺었지만 다른 남자에게 시집간 여성이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날을 잡았던 것. 하지만 그가 최초로 죽인 이는 전 애인도 아닌, 그를 키워준 할머니였다. 도끼로 할머니의 목을 내리쳐 즉사시켰다. 그는 할머니를 죽인 이유를 할머니가 “살인자의 할머니”로 살아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유서에 적었다고 한다. 이후 아주 조그만 마을의 이웃들을 1시간30여분 동안 엽총과 일본도로 무참히 살해했다. 사망자 30명 중 5명이 16세 이하였다.

범행도 계획적이고 살해 순간에도 냉정했다고 증언자들은 입을 모은다. 사이코패스 성향의 소유자였던 모양이다. 전봇대에 올라 전선을 잘라 마을을 암흑에 빠트린 그는  검정 교복을 입고 머리에는 소형 회중전등을 달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쉽게 살인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는 특히 범행 전에 “결핵으로 죽는다면 ‘아베 사다 사건’ 이상의 엄청난 짓을 저지를 것”이라고 친구에게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역시 도리마의 살인예고인 셈이다. 1936년 발생한 아베 사다 사건에 평소 큰 관심을 보였던 그는 한 지인에겐 비밀리에 유통되던 피의자 아베 사다의 진술서 복사본을 보였줬다고 한다.


그가 무차별 살인행각을 벌이기 2년 전에 발생한 아베 사다 사건은 지금 들어도 오싹하다. 과격한 성 묘사와 엽기성으로 일본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하드코어 작품 <감각의 제국>으로 영화화된 사건이다.



1936년 5월 21일 도쿄 시나가와의 한 여관에서 아베는 자신의 정부를 죽인다. 수면제를 마시게 한 뒤 목을 조른다. 죽은 애인의 성기를 자른다. 그러고는 핏물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영원히 함께했다.’ 그녀는 수갑을 찬 뒤에도 태연했다고 한다.



에도시대 수필집에 그려진 길거리 악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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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dd 2011.04.19 08: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대로 된 가정교육을 못받았거나 성장과정이 잘못된 사람이다. 제가 못먹는 떡에 침이라도 뱉는 심보를 지닌 사람.그런 환경이라고 모두 그 사람같지는 않을터.일본의 자기가 소속한 이외의 집단에 대한 배타주의가 이런 외톨이의 소외감을 배가시켰는지도.



권·언유착. 이 괴물은 특히 나라가 어수선할 때 본색을 드러낸다. 

1931년 만주사변이 터지고 국제정세가 장난이 아닐 때 일본에 거대 통신사가 발족했다. 36년 1월 국가총동원 체제를 구축하고 있던 일본은 당시 두 통신사를 합병, 도메이(同盟)통신사를 만들었다. 국영통신사다.

출생 때부터 도메이통신의 역할은 태평양전쟁에 대한 일본 국민의 전의를 불태우는 프로파간다 보도였다.


무선 통신망과 전용 비행기를 통해 세계 각지에 '일본의 승전보'를 타진했고 '도메이 사진 특보'라는 일간 사진 뉴스를 제작해 일본 전국에 배포하며 '무적 일본'을 외쳤다. "가자! 폭악무도한 미·영 격멸…". 기사 제목만 봐도 그 색깔이 보인다.

일본군이 외국 어린이들과 함께 놀고 도와주는 모습의 사진을 게재하는 등 구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킨다는 '대동아공영권'을 합리화하는 데 일조했다. 

일본군이 가는 곳에는 늘 야전지국이 개설됐다. "히노마루가 나부끼는 곳에 도메이가 있다"는 도메이통신의 슬로건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인력규모도 어마어마했다. 44년 4월, 도메이통신의 해외 지국은 총 70여곳. 직원 수는 중국 지역에만 1700명에 이르렀다. 현재 교도통신의 특파원은 70여명이다. 

도메이통신은 보도 차원을 넘어 일본 정부로선 가장 핵심적인 임무를 띠고 있었다. 승전을 위한 해외 정보 수집에도 전념해야 했다.

정부로부터 기밀비 명목으로 거액의 돈을 받고 해외통신사가 발신하는 무선내용을 독점적으로 감청하는 권한을 얻었다. 수집 정보 가운데 자국민 귀에 들어가서는 안되는(전세에 불리한) 극비 정보를 정부 수뇌부에게 전달하는 게 도메이통신의 핵심 임무였다.

그러나 전세가 점점 연합군 쪽으로 기울면서 '대본영' 발표내용과 실제 해외에서 들어오는 정보 간 괴리는 커져만 갔다.

기자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곧 패전병이 될 것이라는 것을. 세월이 흐른 후 당시 기자였던 A씨는 "해외통신사에 맞서기 위해 거짓 뉴스를 만들어야 했다. 저쪽이 이긴다고 방송하면 우리도 이겼다는 뉴스를 내보냈다"고 고백했다.

해외 정보를 빼놓지 않으면서 자국의 형편을 꿰뚫고 있는 기자들인지라 당연히 짙은 먹구름이 몰려 오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이 또한 상부에 보고했다. 히로시마 원폭투하를 인정한 트루먼 성명을 정부에 전달, '종전 공작'을 펴게 한 일등공신이 도메이통신이었다. 그야말로 비판과 견제를 포기한 '딸랑이' 언론이었던 셈이다.

도메이통신의 기사  원본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패전 직후 상부에서 소각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당시 수많은 자료를 불태워 생긴 연기가 수일간 피어올랐고 통신사 본사가 있던 도쿄 치요다구의 히비야공원을 뒤덮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도메이통신의 '오역' 이야기는 유명하다. 여러 주장이 얽히고설키고 있지만.

45년 7월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국 수뇌들은 포츠담선언을 통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무조건 항복'과 '완전한 파멸' 중 택일하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일왕 히로히토는 시간을 끌었다. "무조건 항복 요구에 대한 답변을 당분간 보류한다"는 성명서를 스즈키 간타로 총리 명의로 발표했다.

그런데
스즈키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모쿠사츠(黙殺, mokusatsu)'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모호한 표현이었다. 이는 '묵살한다'(ignore)와 '언급(논평)을 삼간다'(no comment)라는 두 가지 뜻을 갖고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도메이통신이 영문기사에서 '모쿠사츠'를 '묵살한다'(ignore)로 타전해버렸다. '라디오 도쿄'의 영어방송도 똑같이 전했다. 그러자 로이터와 AP통신은 이를 'reject'(거부)로 재가공했고, 미 트루먼 대통령은 뿔났다. 그래서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기로 결정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결과론적으로 도메이통신은 진정으로 세계평화를 바란 언론사였다?! 

국민을 시각·청각 장애인으로 만들어버리는 권언유착은 그래서 망국의 지름길이다.



Posted by 경향교열 고영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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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녀자들이 가슴도 가리지 않은 채 아무렇지도 않게 다니다니…."

에도시대 말기 일본의 쇄국 빗장을 풀러 온 페리 제독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대중 목욕탕에서 벌거벗은 남녀들이 중요한 부분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한 장소에서 목욕하는 있는 게 아닌가.
  

페리 제독이 '일본원정기'에 그린 일본의 혼욕 문화.

일본에서 오래된 풍습인 남녀 혼탕(일본은 혼욕이라 칭함)의 얘기는 에도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화재와 싸움은 에도의 꽃'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인구가 많고 목조가옥이 밀집한 에도에서는 화재사고가 빈번했다. 그래서 일반 서민들이 욕실을 만들어 목욕하는 일은 먼나라 얘기였다.

하지만 이세 요이치라는 자가 유료 입욕시설을 지어 최초로 일본 대중 목욕탕(센토) 시대를 열었다. 이후 에도에는 목욕탕이 우후죽순 들어서면서 전성기를 누렸다. 

목욕탕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남녀 혼욕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사람들은 남녀가 같이 목욕하는 것을 외설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혼욕의 주요 배경에는 목욕탕 업주의 계산이 깔려 있었다. 남녀 탕을 따로 만들려면 돈이 더 써야 하기 때문에 혼욕을 고집한 것이다.

당시 목욕탕은 입구가 좁고 창도 없고 어두웠다. 가끔 풍기문란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서민들은 혼욕이 풍속을 해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한 인물이 혼욕을 못마땅했다. 에도막부 제8대 쇼군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그는 혼욕이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1791년 혼욕금지령을 내렸다. 가장 타격이 큰 쪽은 물론 목욕탕 업주 측이었다. 이때부터 당국과 업주 간의 밀고 당기기가 전개된다.

여탕을 따로 만들길 거부한 업주는 머리를 짜더니 '시간제' 운영이라는 묘안을 냈다. 하루 중 몇시부터 몇시까지는 남자들이, 또 다른 시간은 여자들이 이용하게끔 한 것이다. 지금도 혼욕 온천에서는 이 같은 시간제를 취하는 곳이 있다.

그러나 나중에 막부는 이런 시간제도 금지했다. 그러자 업주 측은 '남자의 날'과 '여자의 날'을 만들었다. 끝자리가 1과 6인 날만 여자들이 목욕할 수 있게 했다. 여자의 날과 남자의 날을 반반씩 하면 될 텐데라고 생각되겠지만, 당시 일본에서도 남존여비 사상이 뚜렸했음을 알 수 있다. 날짜 수가 적었기에 '여자의 날'만 되면 목욕탕은 발디딜 틈이 없이 대혼잡을 이뤘다.

여자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결국 폭발했다. 남성전용의 날에, 목욕하고픈 욕망을 억제하지 못한 여성들이 기습(?)하는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자 막부의 혼욕금지 의욕은 약해졌고 자연스레 혼욕이 묵인되게 됐다.

그렇다고 혼욕의 수난이 멈춘 게 아니다. 앞서 말한 페리 제독은 혼욕 현장을 목격하고는 "일본인은 음탕하다"며 노골적으로 비난했고 1858년 혼욕 금지령이 발표됐다. 도심에서는 단속이 강화됐지만 당시에도 혼욕금지령이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러자 '탈아입구' 노선을 견지했던 메이지정부는 1869년 혼욕금지령을 내린 데 모자라 1872년 사람 앞에서 옷을 벗으면 안된다고 못박았다. 이에 대해 당시 한 잡지는 "나체와 상반신 노출이 안된다면 언제나 상반신을 노출하고 있는 석가모니는 어떻게 되는가"라고 비꼬았다.

니가타현의 한 혼욕 노천탕. 간단한 탈의실이 있지만 남녀를 구별하는 표시가 없다.(위키피디아)

이후에도 혼욕금지령이 자주 내려졌으나 지방 온천지 등 여러 곳에서 혼욕이 당연시되는 문화가 이어졌다. 고도성장기에 접어들면서 혼욕문화와는 거리가 먼 도시 관광객들이 지방으로 몰려오자 '문화적 쇼크' 때문에 수입이 줄 것으로 판단한 현지의 혼욕 여관과 호텔이 남녀 탕을 따로 만드는 증·개축 공사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혼욕탕의 수는 급감하게 된다. 그래도 혼탕을 오래된 풍습으로 여기는 곳에서는 지금도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아이리스>의 이병헌은 일본 로케이션 촬영 때 노천탕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갑자기 일본 아줌마들이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탕에 들어오는 사건과 조우했다.  그는 "얘기만 들었지만 문화적 차이를 몸소 느꼈다"고 했다. 당시 이병헌은 수증기 때문에 자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무사히 온천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혼욕해도 수증기가 모자이크 역할을 하니 안심해도 된다는 얘기?!

최근 일본 지자체에선 혼욕이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어 혼욕을 금지하던 지자체가 조례를 바꾸면서까지 관광객 유치에 나서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온천에서의 혼욕은 그렇다 치자. 뭐 가릴 거 다 가리면 될 테니깐. 근데 동네 목욕탕에서, 그것도 무방비 상태에서 느닷없이 청소 아줌마(어떤 땐 아가씨 직원)가 들어와 남탕을 제 집인 양 휘젓고 다닐 때의 황당함이란.

Posted by 경향교열 고영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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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고은 2010.12.31 14: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하~. 이런 것이었군요! 솔솔한 정보네요.ㅎㅎ

  2. 음.. 2011.11.03 07: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쿄에 젊은 여성들 많이 오는데 어딘지 알고싶네요.

    없으면 곧 생겼으면 좋겠어요.

  3. 저도깜놀 2012.02.11 21: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 큐슈지방 한 온천탕에 갔는데

    우리는 홀라당 벗고 목욕중인데

    일하는 아줌마가 휘젓고 다녀서 깜놀..

  4. 백남해 2012.05.10 13: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일본 목욕탕에서 청소 아줌마와 눈을 마주친적이 있습니다.

    쩝....



우리 군이 연평도 해상사격훈련을 실시하기 직전, 트위터에선 ‘전시 대피 요령이 적힌 공문이 집에 왔다’는 내용들이 올라왔다. 그래서 궁금했다. 애 엄마에게 물었다. 우리 집에도 그런 게 왔느냐고. 잠시 후 쓰레기통으로 향하기 직전의 그 ‘찌라시’(아래 사진)를 볼 수 있었다.

맨 위 제목부터 보고 뜨악했다. <전시 국민행동요령>이다. 공습경보 발령, 대피시 필수지참 용품…. 마치 ‘전쟁이 곧 일어날 것이니 준비하시오’로 보였다. 나름 확신했던 ‘전쟁불가론’이 ‘전쟁불가피론’으로 바뀌는 데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공문’은 군대 영장처럼 사람을 떨게 만든다.



대피요령 찌라시만 봐도 이럴지언정, 북한 해안포와 마주하고 있는 연평도 현지 대피소에 있던 주민들과 취재진은 어땠을까. 신문을 보니 다들 대피소 문닫는 소리에, 우리 군이 쏜 포 소리에 전쟁 난 줄 알고 새가슴이 됐다고 한다.

이때다 싶었을 터. 정권은 국민을 살린답시고 사회를 안보정국으로 몰아가고 있다. (총성으로 분위기를 일신하겠다는 위정자나, 고령에도 군복을 입고 “때려잡자”고 외치는 그분들을 제외한) 국민은 전쟁을 원치 않는다. 두려워한다.

그날, 전범국가 일본도 떨었다. 아니, 떨 겨를도 없었다. “천황 폐하 만세”를 외쳤던 일본인들이다. 그러나 ‘천황’은 그들을 불지옥으로 떠밀었다. 강제로 끌려간 한국인들은 더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1945년 3월10일 새벽, 미군 제73, 313, 314 등 3개 항공단으로 구성된 B-29 폭격기 344대가 일본 심장부를 습격했다. 글리세린과 기름을 섞어 만든 소이탄
2400t을 퍼부었다. 지옥불을 맞은 도쿄의 밤은 대낮처럼 밝아졌고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일본은 1944년 11월14일 이후 106회의 공습을 당했다. 이전 공습과는 달리 이날 대공습은 저고도 비행에 의한 야간 소이탄 공격이어서 피해는 막대했다.

불 붙은 기름이 강, 바다에서도 불길을 일으켰다. 시체는 검게 타 남녀를 구분할 수 없었고 물에 떠다니는 사지는 불에 탄 나뭇가지와 구별하기 어려웠다. 당시 경시청은 8만3793명이 사망했다고 밝혔지만 10만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수공장에 강제로 끌려 온 1만명이 넘는 조선 사람들도 희생됐다. 7만여구가 신원 확인이 안됐다.



방공대책은 ‘너희들은 살 생각 말라’는 식이었다. 내무성이 작성한 자료는 “불이 나더라도 경찰 소방 관리나 경방단(방공 임무를 띤 민간조직)의 지도가 있을 때까지 끝까지 소화와 연소 방지에 나선다”고 적고 있다. 불에 타 죽은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다. 

국민에겐 도망치지 말 것을 강요하면서 정작 군대는 적기를 향해 사격도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피해 주민에게 군대가 가진 식량 중 일부를 떼어 도와주는 일도 없었다. 군이 주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민의 희생으로 군이 살아남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폐하의 신민(臣民)은 국체를 지키기 위해서는 옥쇄(玉碎)를 각오해야 한다.” “우리는 국가를 지키는 전사다. 목숨을 바쳐 지키겠다.” 이른바 ‘천황 군대’는 도쿄 시민을 “황거를 지키는 명예로운 방위전사”로 규정했다. 
 
군인칙유(1882년 천황이 군인에게 ‘하사’)에서는
군인의 덕목 가운데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가장 중요시했다. ‘천황 통수권’ 아래 일본군을 국민의 군대가 아닌 ‘천황의 군대’로 규정하고 있다. 상관의 명령은 곧 ‘천황의 명령’이니 절대 복종해야 하며 군인의 죽음은 ‘천황에 대한 충절’을 뜻했다.

일왕은 공습을 당한 일주일 후 피해지역을 시찰했다. 신문은 그의 시찰 모습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신문제목만 봐도 낯간지럽다. ▲황송스럽게도 천황폐하 피해지역 순찰 ▲초토화된 땅에 서신 폐하의 인자하신 마음
▲적을 멸망시키겠다는 1억 일본인의 맹세가 새롭다…. 사진 설명도 기가 찬다. “초토화된 땅을 도보
로 둘러보시다.” 말 타고 시찰했어야 정상이란 말인가? 

피해지역을 시찰 중인 히로히토 일왕.


전후 미국은 일왕의 전쟁책임을 따지지 않았다. 그를 위해 죽은 이들을 신으로 떠받드는 군국주의 색채의 야스쿠니신사도 폐쇄조치를 면했다.

도쿄대공습 후 정든 땅을 떠난 이들은 처참한 체험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다음과 같은 함구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공습피해나 방공 전투 상황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신문이나 라디오를 통해 당국이 알려준다. 이 발표를 절대로 신뢰하고, 마음대로 상상해서 지껄인다거나 직접 보거나 들은 것일지라도 가볍게 글로 쓰거나 말하는 것은 악선전의 원인이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자료
일본의 불안을 읽는다(권혁태), 천황제 50문50답(일본역사교육자협의회), 위키피디아

트위터 @godori71

Posted by 경향교열 고영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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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5월15일 화창한 일요일, 이누카와 쓰요시 총리(사진)는 관저에서 한가로이 휴일을 만끽하고 있었다. 부인과 비서관은 외출하고 없었다.

그는 검진하러 온 의사에게 "몸 어디에도 이상이 없다. 앞으로 100년은 더 살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100년이 아닌 단 하루도 살지 못했다.
 
이날 오후 5시30분쯤 해군을 중심으로 한 청년 장교들이 총을 쏘며 관저에 난입했다. 총리는 그들이 쏜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밤 11시26분,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정당 중심의 의회 민주주의 정치가 종말을 고하고 군부 통치의 신호탄이 된 5·15사건.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쥔 군부의 영향력이 확대되며 독일처럼 '국가사회주의' 운동이 본격화되고 여론이 우경화하면서 일본은 본격적인 전쟁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5·15사건을 전한 당시 오사카아사히신문(이상 위키피디아)

당시 1929년 세계공황의 여파로 기업의 도산이 잇따르고 사회는 점점 불안해졌다. 경제상황은 피폐한데 정치·기업인들의 부패가 만연해 여론의 공분을 샀다. 이런 가운데 군부를 견제하려는 내각에 불만을 품은 젊은 군인들이 들고 일어섰다. 애초 이들은 총리 관저뿐만 아니라 미쓰비시은행과 경시청, 변전소까지 습격해 도쿄 전체를 암흑의 세계로 만들 계획이었다.

정치인만이 타깃이 아니었다. 뜻밖의 인물이 이들의 제거대상 0순위에 놓여 있었다. 세계 최고의 희극배우이자 영화제작자인 찰리 채플린(1889~1977)이다. 사건이 발발할 즈음 일본을 방문 중이던 채플린은 강경파 군인들의 눈에 "외국문화의 상징이자 일본에 퇴폐문화를 퍼뜨린 원흉"으로 비쳤다. 외국세력 타도를 외친 5·15 사건 주모자들은 채플린에게도 총구를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엔 미국과 영국의 신경을 건드리려는 목적도 깔려 있었다.

채플린을 위기에서 구한 것은 '정보'와 '연출'이었다. 일본을 좋아한 채플린이었지만 그의 비서 고노 도라이치는 일본 사회가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테러를 예감한 것이다. 일본 측 지인에게 정보를 타진했고 한 육군 관계자는 고노에게 편지를 보내 "최근 일본은 어수선하다. 조심하라"며 당시 일본 정세를 전했다. 이어 "(채플린이 도착하면) 가능한 한 빨리 도쿄로 오는 게 좋다. 도쿄에 오면 우선 고쿄(일왕이 사는 곳)로 가라"고 지시했다. 비서 고노는 채플린보다 한 달 일찍 일본에 와서 촬영소 방문이나 환영회 참석 등 채플린의 스케줄을 치밀하게 짰다.

채플린과 비서 고노 도라이치(1927년 촬영)=산케이신문


 
사건 전날인 5월14일 고베항에 내린 채플린은 교토와 오사카를 지나치고 도쿄로 직행했다. 그리고 일왕이 사는 고쿄 근처에 다다르자 차에서 내렸다. 비서 고노의 말에 따른 것이다. 고노는 채플린에게 이렇게 주문했다. "고쿄 쪽을 향해 인사를 해 주십시오." 채플린은 영문도 모른 채 비서가 시키는 대로 했다. 채플린의 이 행동은 당시 신문 등에서 크게 다뤘다.

채플린의 '이상한' 행동을 두고 세간에선 "단순한 어필이다" "수상한 차에 쫓겼고 습격을 피하기 위해 그랬다"는 등의 억측이 나돌았다. 하지만 이는 불안한 기운을 감지한 비서 고노가 채플린의 좋은 인상을 보여주기 위해 펼친 여론환기용 '연출'이었다. 일왕에게 예를 갖춘 수수께끼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채플린의 "세기의 명연기"가 된 셈이다.

총리 관저에서 총성이 울려퍼진 날, 예정대로라면 채플린은 관저에서 총리와 공식적으로 만남(환영회)을 가졌어야 한다. 총리와 같이 있었다면…. 하지만 채플린은 피바다가 예고된 총리와의 만남을 접고 스모가 열리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한편 채플린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비서 고노는 사건이 발생한 지 2년이 지난 후 채플린 비서직을 그만둔다. 하지만1941년 스파이 혐의로 FBI에 체포되는 수모를 겪는다. 전쟁 중엔 강제수용소 생활을 해야 했고 1948년 자유의 몸이 됐다.

Posted by 경향교열 고영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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