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1등이어야 합니까?”


2009년 11월 일본 정권이 민주당으로 바뀐 뒤 도입된 공개 예산심사에서 당시 렌호 중의원(현 행정쇄신상)이 이렇게 쏘아붙였습니다. ‘세계 1위’ 슈퍼컴퓨터를 만드는 데 굳이 거액의 재정을 투입해야 하느냐고 태클을 건 것이죠.


심사 결과 예산은 깎였습니다. 2년간 슈퍼컴퓨터 본체를 개발하는 데 600억엔이 쓰일 예정이었으나 결국 3년간 490억원 투입하는 것으로 매듭지어졌습니다. 그런데 렌호의 이 발언은 유명세를 탔습니다. 강한 어조로 문부과학성 담당자들을 궁지로 몬 렌호의 발언 모습은 TV에서 수차례 방송됐고 그의 말은 2010년 유행어 대상 후보로도 올랐습니다. 렌호를 패러디한 TV 광고도 전파를 탔습니다.


렌호가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진 슈퍼컴퓨터가 최근 세계 1위에 복귀하면서 렌호의 발언이 다시 회자되고 있습니다. 일본 이화학연구소와 후지쓰가 공동 개발한 슈퍼컴퓨터가 최근 독일에서 열린 국제슈퍼컴퓨팅콘퍼런스에서 정상을 차지한 것이죠. 이 슈퍼컴퓨터의 계산속도는 지난해 1위에 오른 중국의 것보다 3배가 넘는다고 합니다. 일본의 슈퍼컴퓨터가 1위에 오른 것은 2004년 3년간 지키던 1위 자리를 중국에 내준 뒤 7년 만의 일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컴퓨터는 일본…한국은 20위권


슈퍼컴퓨터를 만드는 데 동일본 대지진 피해지역의 중소기업이 다수 참여하고 있어 “재해를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는 반응도 나왔습니다. 일본은 이 슈퍼컴퓨터를 지진 예측 등에 활용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다카키 요시아키 문부상은 회견에서 일본의 슈퍼컴퓨터가 7년 만에 세계 1위에 오른 것에 대해 렌호 행정쇄신상의 그때 그 발언을 건드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학자가 분발해 되레 탄력이 됐다.” 일본의 슈퍼컴퓨터 세계 1위 탈환은 렌호의 독설 덕분이라는 얘기죠. 칭찬인지 비아냥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산 삭감에 앞장섰던 렌호 행정쇄신상 당사자는 전날 기자회견에서 “매우 기쁜 소식”이라며 “관계자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과거 발언에 대한 질문에는 “언론이 마음대로 작은 부분만 끄집어냈다”며 “발언 전후를 보면 잘못된 보도”라고 지적했습니다.


당시 렌호의 발언은 노벨상 수상자들이 회견에서 “1위를 목표로 하지 않으면 2위, 3위도 되지 않는다”고 반발할 정도로 파장이 컸습니다.


렌호는 당시 “1위를 지킬 수 있는 기간은 얼마나 되나?” “일시적으로 1위 자리에 앉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고 질문했습니다. 당국 관계자는 “국민에게 꿈을 안기는 게 큰 목적”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렌호는 그런 생각과 꿈을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전제하면서 “정말 이 금액이 필요한가. 좀 더 알려달라”고 추궁했습니다. 그러고는 “2등이면 안되냐”라고 거듭 묻습니다. 나아가 2등 아래로 처지면 그때까지의 인적, 물적 투자가 제로가 되느냐라고 몰아붙입니다. 아울러 미국과의 공동개발 가능성도 타진했습니다.


문부성 관계자는 렌호의 “꼭 1등이어야 하나. 2등이면 안되나?”는 발언에 대해 “슈퍼컴퓨터의 의의와 세계 1등을 지향할 필요성에 대해 여론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돼 결과적으로 좋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실제 연구자들이 렌호의 말에 자극받아 더욱 분발했을 것이라 판단한 모양입니다.

한편 렌호는 작년 펴낸 책 <최고가 아니면 안됩니까?>에서 일본이 성공을 인정받으려면 경제대국으로서의 짐을 내려놔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간 나오토 정부의 스타 각료인 미모의 렌호는 예산사업 재편성을 주도하면서 일약 스타로 떠올라 각료에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대만계 혼혈입니다. 사업가인 대만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고교생 때 일본 국적을 취득했고 대학 시절 수영복 모델을 거쳐 연예계에 발을 디뎠고, 이후 민영방송의 사회자 등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2004년 참의원 선거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작년 9월 장관으로 취임한 이후 뛰어난 패션감각 등을 무기로 줄곧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그는 작년 일본, 대만, 중국이 서로 영유권을 주장하는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 대해 “(센카쿠열도는) 결국 영토문제인 만큼 일본의 입장을 의연하고 냉정하게 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대만계의 입에서 나와서 그랬을까요. 그의 발언은 "센카쿠열도에 대한 영토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일본 정부의 공식입장과 궤를 달리합니다. 영토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죠. 언론이 가만 놔두지 않자 결국 그는 "센카쿠 열도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우리나라(일본) 고유의 것"이라고 말을 바꿨습니다.

그래도 그는 도쿄에서 참의원에 출마해 171만표를 얻어 전국 선거구 최다 득표자가 될 정도로 인지도가 매우 높습니다. 얼마 전 치러진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이시하라 신타로의 유력한 대항마로도 거론된 바 있죠.


국회의사당에서 패션지에 실릴 사진을 촬영해 “모델로 전향하라”는 야당 측 공격을 받으며 구설에 오르는 등 그의 입과 행동에는 늘 세간의 이목과 언론이 따라붙습니다. 눈빛이 살아 있는, 뭔가 큰일을 낼 것 같은 그의 향후 행보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는 이유죠.

Posted by 경향교열 고영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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