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명함을 주고받았죠. 그의 것이 참 심플했습니다. “OO상사”라는 회사명 아래에 개인 휴대전화 번호뿐이었죠. 그는 국정원 직원입니다. 기밀을 다루는 곳이라 그의 신분도 급수는 차치하더라도 함부로 노출해서는 안되는 모양입니다.


정보원도 아닌데 신분 노출을 극도로 꺼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동일본 대지진에 이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비난을 한몸에 받고 있는 도쿄전력 직원들입니다.


“도쿄전력 직원”이라고 당당히 말하지 못하고 있다는 한 50대 직원은 이렇게 토로합니다. “가장 괴로운 것은 술자리에서 회사가 도쿄전력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상대방 표정을 보는 게 무섭습니다. 계획정전도 실시되고 있는 터라 이웃의 시선도 신경쓰입니다.”


회사 차가 누군가의 손으로 펑크나는 경우도 있네요. 도쿄전력 직원은 차에 붙은 자사 캠페인 스티커를 떼버렸습니다. 캠페인 이름은 'Switch!' 이른바 ‘올전화(all 電化) 주택’을 홍보하는 것으로 조리, 급탕, 냉난방 등 모든 시스템을 전기로 일원화한다는 내용입니다.


화재 위험성이 낮다는 장점이 있다고 홍보하지만, 전력을 대량 소비해버리면 전력 수급에 차질이 빚어져 정전도 감수해야 합니다. 도쿄전력 측은 “광열비를 절약할 수 있다”며 경제적 장점을 강조합니다. 계약을 서두르다 보니 설명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받고 있는 형편이죠. 공정거래위원회가 회사 측 광고에 대해 제재를 가한 적도 있다고 하네요.


특히 이번 지진으로 후쿠시마 원전 등 발전 인프라에 막대한 피해가 발생해 계획정전을 실시하는 등 장기간 전력공급에 애를 먹고 있습니다. 도쿄전력의 올전화 시스템의 약점을 그대로 노출한 셈이죠.



술자리 같은 데서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기 꺼려진다는 도쿄전력 직원의 말을 들은 네티즌들의 반응에 동정은 눈을 씻고도 안 보입니다. 조롱 섞인 비난만이 가득합니다.

"도쿄전력의 호소는 피해지의 (원성의) 100만분의 1이다."  
"원전사고 후에도 술집에 갈 시간이 있구나."
"술마실 돈이 있다면 피해자들을 위해 성금이나 내라."

반려자를 맞이하기 힘들어졌다고 호소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30대의 한 도쿄전력 사원은 "동료가 곧 열릴 예정이던 결혼식을 취소했다. 상사도 축사를 할 수 없을 뿐더러 사내에서는 당연하다는 반응이다. 나도 결혼을 생각하는 상대가 있지만 그녀도 솔직히 불안한 기색"이라고 답답해합니다.


이 직원의 말을 듣자니 대지진 발생 후 남자친구로부터 일방적인 파혼 통보를 받았다는 후쿠시마 여성의 사연이 떠오르네요. 올해 안에 결혼할 계획이었고 갑자기 헤어질 만한 이유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추측하는 파혼 이유는 대지진으로 터진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입니다. 그녀는 "만약 이런 이유로 헤어지는 것이라면 나는 일생 후쿠시마현 여자이니까 결혼이나 연애는 안될 것 같아 무섭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대지진 발생 후 '조용한' 일본인들의 '이지메'가 곳곳에서 목격됐죠. 피난을 떠난 후쿠시마현 주민들이 인근 호텔 등지를 찾았으나 숙박을 거부당해 파장이 일었습니다. 언론 보도가 나가자 후생노동성은 후쿠시마현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업소들이 숙박을 거절할 수 없게끔 조치를 취할 것을 각 지자체에 통보했습니다. 

피난 온 초등생 형제가 공원에서 놀던 중 "후쿠시마현에서 왔다"고 하자 아이들은 "방사능이 옮는다"며 괴성을 지르며 달아나는 일도 있었습니다. 충격을 받은 형제는 울면서 집으로 왔고 화가 난 부모는 "이럴 바에는…" 하며 다시 후쿠시마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택시 승차, 병원 진찰도 거부당한 사례가 속출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에 일본 당국은 언론을 통해 "방사능은 전염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다"라고 사태 진화에 나섰고요.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는 일본인의 침착함"
"일본의 시민의식은 인류의 정신이 진화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어떤 나라도 강력한 지진에 일본만큼 잘 대비돼 있지 않다."

대지진 직후 외신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들도 사람인데. 대지진 직후 침착한 모습을 보이던 그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사재기나 범죄를 일삼고, 대피소에서도 정신적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다는 소식입니다. 그야말로 도쿄전력의 신뢰와 함께 일본인들의 인내심도 멜트다운되고 있는 형국입니다.

특히 후쿠시마 원전 주변은 이미 유령도시가 됐습니다.
이전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은 절망에 묻혀버렸습니다.
후쿠시마현 출신은 어딜 가나 신분을 감춰야 하는 '주홍글씨'를 짊어지고 살아갈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번 대지진, 참으로 일본의 많은 걸 보여주고 있네요.

Posted by 경향교열 고영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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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카방클 2011.06.05 04: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정도로 범사회적으로 이지메를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니..가슴아프네요. 외신들은 근데 좋은점만 비추려고 하는 것 같아 한국인으로서는 좀 씁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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